서악 화산(華山) 주변에 가 볼만한 곳

2024. 4. 6. 10:44중국/중국 중부 트레킹

 

서악묘(西岳廟)

서악묘는 화음시(华阴市)에서 동쪽으로 5km되는 곳에 있으며, 서악황제인 화산신(华山神)을 모시는 사당이다. 서악묘는 한무제 때 건축되었으며, 이후 역대 제왕들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서악묘는 남향으로 건축되었으며 대문은 화산을 바라보고 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호령문(灵门)오봉루(五凤楼)령성문(棂星门)금성문(金城门)호령전(灵殿)침궁(寝宫)어서루(御书楼)만수각(万寿阁) 등이 건축되었다. 다른 이름으로는 화악묘황묘대묘 등으로 불리며, 오악에 있는 사당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며, 북경의 자금성을 모델로 건축 되었다.

서악묘 전경

 

진시황릉(秦始皇陵)과 병마용갱(兵馬俑坑)

사마천은 사기에서 시황제는 즉위하면서부터 여산에 능을 만들기 시작, 70만 명을 동원했다고 썼다. 능묘는 37년간이 걸려 완공되었는데, 무덤의 둘레 6, 높이 40m, 전체 면적 2(60만평), 지하 4층 구조로 되어 있다. 그 규모나 구조가 무덤이라기보다 지하궁전에 버금간다. 하지만 아직 내부는 개발이 되지 않아 입장료를 내고 들어간다고 해도 내부는 볼 수가 없다.

진시황이 무덤을 설계할 때, 훗날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서 수은을 이용한 하천을 만들고 여러 가지 함정들을 설치해 두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그 비밀을 풀 수 없어 과학이 조금 더 발전하여 그 비밀을 풀 수 있을 때 발굴 한다고 한다. 따라서 진시황릉 까지 간다고 해도 내부에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 사진촬영을 하거나 릉 위에 오르는 정도의 관광을 할 수 있다.

 

병마용은 죽은 진시황을 수호하는 진나라의 군대로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진시황릉과 불과 1거리에 있다. 병용은 키가 184cm-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이 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병마용은 전사전차장교곡예사역사악사 등 다양한 사람과 사물을 표현하고 있다.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 130개의 전차, 520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직 상당수가 흙 속에 묻혀 있다.

진시황릉으로 추정되는 곳 앞에 세워진 진시황 동상

 

병마용 갱의 모습

삼장법사와 대안탑(大雁塔)

서안 남쪽 4에 위치한 자은사는 당나라 고종이 망모 문덕 황후를 위해서 세운 절이고, 그 안에 서안의 상징물 대안탑이 64m 높이로 솟아있다. 이 탑은 삼장법사로 널리 알려진 당의 고승 현장이 645년 천축(天竺)에서 가져온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서 세워졌다.

 

양귀비(楊貴妃)와 화청지(華淸池)

화청지는 서안시에서 동쪽으로 약30떨어진 곳에 있다. 여산을 등에 업고 아담하게 들어서 있는데, 당 현종(李隆基)과 양귀비(楊玉環 719-756)와의 사랑이 어려 있는 곳이다. 또 이곳은 온천지로 유명해 황제들이 온천을 즐겼다고 한다. 내부에는 양귀비가 목욕을 하던 해당탕과 현종이 목욕을 하던 연화탕 등이 복원되어 있다. 한편 화청지는 대만을 건립한 장개석이 본토에서 대만으로 피난 가기 전 임시 피난소 및 사무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양귀비와 화청지

 

중국 고대의 4대 미녀(美女)

 

서시(西施 기원 500년 전): ()왕 부차(夫差)의 여자, 눈살을 찌푸릴 때 더욱 아름다워 서시빈목(西施嚬目)이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원정(怨情)/이태백

美人捲珠簾(미인권주렴) 구슬을 단 주렴을 반쯤 걷고

深坐嚬蛾眉(심좌빈아미) 그림 그린 듯 앉아서 아미를 찡 그린다

但見淚痕濕(단견루흔습) 옥 같은 볼을 적시는 이슬

不知心恨誰(부지심한수) 누구를 원망하는 것일까 모르겠네

(해설: 세상에는 많은 미인도가 있지만 대부분 생기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미인을 공간에 놓고 보니 부처님의 미소를 보듯 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태백의 미인은 애태우고 가슴조이는 순간을 포착하여 묘사할 때, 번뇌 많은 살아 있는 미인을 보게 되는 것이다. 더군다나 주렴사이로 반만 보이는 미인의 자태는 뭇 사내들의 시선을 더욱 끌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서곡(烏棲曲)/이태백

姑蘇臺上烏棲時(고소대상오루시) 고소대 위 까마귀 다락에 오르려 할 적에

吳王宮裏醉西施(오왕궁이취서시) 오왕 부차는 궁중에서 서시에 흠뻑 취했네

吳歌楚舞歡未畢(오가초무환미필) 오가 초무의 환락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靑山猶銜半邊日(청산유형반변일) 푸른 산은 어느 덧 지는 해를 반쯤 삼켰네

銀箭金壺漏水多(은전금호누수다) 은 화살 세운 금 항아리에선 물이 많이 새었고

起看秋月墜江波(기간추월추강파) 일어나 바라보니 가을 달 물결 속에 빠져 있네

東方漸高奈樂何(동방점고내락하) 동녘이 벌써 밝아 왔는데 못 다한 즐거움 어이 했을까?

 

 

양귀비(楊貴妃 719-756) () 현종의 첩,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부귀모란(富貴牡丹:부귀한 모란처럼 통통하고 복스러운 미녀)계두지육(鷄頭之肉:맨드라미 과육처럼 풍만한 유방을 가진 미녀)형 미인이라 한다.

 

 

왕소군(王昭君 기원전 100): 전한(前漢) 말 원제(元帝)의 궁녀. 성은 이고 호는 소군이다.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 單于)의 처()이다.

서경잡기에 의하면, 원제는 흉노와의 화친정책으로 궁녀 중 가장 추한여성을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왕소군은 화상에게 뇌물을 주지 않아 가장 추하게 그려져 결국은 흉노에 가게 되었다. 황제에게 이별을 알리는 자리에서 원제는 왕소군의 아름다움에 아차하고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이 보내고 말았고 격노한 원제는 화상의 목을 쳤다고 한다.

 

흉노족의 고향인 내몽고자치구(内蒙古自治区) 호화호특시(呼和浩特市) 옥천구(玉泉区)에는 왕소군의 묘소가 있다. ()나라의 제왕능묘와 비슷한 형상과 구조로 되어있는데 두 번째 단과 묘의 꼭대기에는 각각 정자가 하나씩 지어져 있다.

 

왕소군(王昭君)/이태백

漢家秦地月(한가진지월) 한나라 진나라 땅의 달이

流影送明妃(유영송명비) 달그림자를 흩날리며 명비를 보내네

一上玉關道(일상옥관도) 한 번 옥문관을 나서더니

天涯去不歸(천애거불귀) 하늘 끝에 가서는 다시는 오지 않네

漢月還從東海出(한월환종동해출) 한나라의 달은 여전히 동해에 뜨건만

明妃西嫁無來日(명비서가무래일) 명비는 서쪽 땅으로 가더니 돌아오지 않네

燕支長寒雪作花(연지장한설작화) 연지산은 늘 추워 눈꽃을 만들고

峨眉憔悴沒胡沙(아미초췌몰호사) 미인은 초췌해져 오랑캐 땅에 묻히네

生乏黃金枉圖畵(생지황금왕도화) 살아선 황금이 없어 초상화를 못 그리게 하더니

死留靑塚使人嗟(사유청총사인차) 죽어선 푸른 무덤을 남겨 탄식케 한다.

 

 

초선(貂嬋 가공인물):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왕윤의 수양딸로서 동탁 과 여포를 이간질하는 여인으로 나온 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