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르포] 일본 북알프스 - 2 (월간 산)

2009. 5. 17. 19:10국내산행정보/....국내산행 정보

[특파원 르포] 일본 북알프스
날카로운 창끝에서 한 걸음 떨어져 갖는 여유

창끝 같은 암봉 너머로 떠오르는 태양
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날 아침 창문 너머로 일출을 볼 수 있었다. 야리가다케 왼쪽 능선에서 뜨는 태양은 정말 장관이었다. 창끝처럼 날카로운 봉우리와 어우러진 붉은 하늘은 멋진 조화를 이뤘다. 카사가다케가 아니면 절대 볼 수 없는 특별한 일출 모습이었다.


▲ 1 높은 산에 걸린 구름이 힘겹게 능선을 타고 넘고 있다. 해질녘 분위기가 일품이다. / 2 설릉을 타고 넘어 야리가다케로 향하는 일행들. /3 키 작은 소나무 하이마츠가 사면을 가득 채운 주능선./4 구름을 뚫고 올라와 설사면을 걷고 있는 엔타비 김용균 대표와 유비씨(앞).

산장에서 10여 분 거리의 카사가다케 정상 역시 멋진 조망처였다. 건너편 능선의 호다카 연봉은 물론이요 멀리 남동쪽으로 솟은 남알프스와 후지산도 한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북쪽으로 돌리면 매끈하게 솟은 하쿠산(白山·2702m) 줄기가 바다를 막고 서 있다. 정면에 우뚝하게 솟은 온다케(御岳·3063m)의 위용도 볼 만했다. 발아래로는 오쿠히다 온천 마을 일대가 세세하게 조망됐다. 카사가다케는 정말 멋진 전망대였다.

이 날 일정은 이번 북알프스 산행의 하이라이트였다. 어제 오후에 지나온 능선길을 역으로 거슬러 스고로쿠다케 산장을 경유한 뒤 야리가다케 산장까지 가는 것이다. 도상거리만 15km가 넘는 먼 길로 12시간은 족히 걸리는 구간이다. 게다가 아직은 시즌이 아니라 산길도 완전치 않았다. 적지 않은 구간이 눈으로 덮여 있어 위험스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믿음직한 두 명의 토박이 산꾼들이 이끌어 주기에 걱정은 없었다.

구름을 벗어버린 북알프스 연봉은 자신의 ‘쌩얼’을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같은 길이지만 이렇게 다른 느낌으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어제 올라온 길과 만나는 누케도다케(2,813m) 갈림길을 지나 지리산 주능선을 걷듯 순한 길을 따라 진행했다. 삼거리에서 1.5km 지점의 이정표에서 오른쪽 유미오리다케(弓折岳·2,588m) 방면으로 내려서는 곳은 경사가 급한 긴 설사면으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산 도중 50m는 족히 되는 긴 로프를 잡고 있어야 안심이 될 정도로 경사가 심했기 때문이다.

설사면을 통과해 작은 언덕을 넘어서니 다시 긴 설릉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다 녹으면 확실하고 안전한 길이 있지만 겨울철에는 설면으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한 루트다. 아이젠을 신었다 벗었다 하며 진행하니 시간이 의외로 많이 걸렸다. 멀리 스고로쿠다케(   六岳·2,860m)와 산장이 보이지만 진행은 의외로 더디다.

유미오리다케 정상에서 오른쪽 계곡 아래로 보이는 카가미다이라 산장(鏡平山   )으로 이어지는 임시 산길이 갈려 나갔다. 북알프스 특유의 고산 소나무인 하이마츠(松) 길로 명명된 코스로, 눈이 완전히 녹기 전까지 스고로쿠다케 산장 직원들이 이용한다.

사면을 질러 난 산길을 지나 스고로쿠다케 산장에 닿았다. 바로 앞에 넓은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고, 커다란 건물 여러 동이 서 있는 제법 큰 규모의 산장이다. 이곳은 북알프스 산군의 중간기점 역할을 하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곳이다. 오쿠히다에서 산행을 시작한 이들이나 다테야마 방면에서 오는 이들은 이곳을 들리게 된다. 야리가다케에서 넘어오는 산꾼들도 반드시 이 산장을 거치게 되어 있다. 장거리 산행을 하는 이들의 중간 기착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답사팀은 스고로쿠다케 산장에서 팀을 둘로 나눴다. 무릎이 좋지 않은 이영섭씨와 시게노 사장은 이곳에서 머물다가 계곡을 타고 내려가기로 했다. 마쓰다씨와 나머지 3명은 무리가 되더라도 야리가다케에 오른 뒤 가미코지로 하산하는 구간을 답사하기로 했다.

산장 앞마당에서 잠시 휴식 뒤 야리가다케로 갈 팀은 길을 떠났다. 이곳에서 야리가다케 산장까지는 최소 4시간은 걸리는 구간이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한달음에 고도를 높여 모미사와다케(木從    岳·2,754m)를 올랐다. 이 능선길은 지금껏 보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조망을 선사했다. 북쪽으로 다테야마 산군들이 병풍처럼 펼쳐지고 야리가다케 뒤편에 솟은 올망졸망한 봉우리들도 눈에 들어왔다.

정상부에서 잠시 숨을 돌린 뒤 서서히 고도를 높이는 능선을 따라 야리가다케를 향해 진행했다. 헌데 고도가 높아지며 능선을 덮은 눈이 문제가 됐다. 길은 사라졌고 칼날능선 한편에 걸린 위태로운 눈처마가 유일한 통로가 됐다. 선두에 서서 길을 안내하던 마쓰다씨도 가끔씩 등산로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곤 했다. 해빙기의 산길은 그만큼 변화무쌍했고 위험했다.


▲ 1카사가다케 객실에서 본 야리가다케의 일출./2널찍한 야영장이 조성되어 있는 스고로쿠다케 산장./3북알프스와 혼슈 중부산악지대가 한눈에 조망되는 카사가다케 정상./4 카사가다케 산장의 모든 스텝과 함께 기념촬영.
해가 뜨던 야리가다케에서 일몰을 보다
미끄러운 눈길 옆은 끝이 보이지 않는 벼랑. 여러 차례 눈처마를 타고 넘는 곡예 끝에 설릉 구간을 빠져나왔다. 사람이 지나간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마쓰다씨는 아마 올해 이곳을 지나간 사람은 우리가 처음일 거라고 했다. 카사가다케와 스고로쿠다케 산장이 6월 중순에야 개장에 들어간 것도 바로 눈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야리가다케 산장에 이르는 마지막 급경사길은 정말 고역스러운 구간이다. 해발고도가 3,000m에 근접하다보니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몇 발짝 가다 쉬고 다시 두어 걸음 가다 주저앉는 일의 연속이다. 스고로쿠다케 산장에서 출발해 5시간이 넘게 걸어 겨우 야리가다케 산장 앞에 도착했다.

야리가다케 산장은 북알프스에서 가장 많은 이들이 이용하는 곳이다. 500명은 족히 묵을 수 있는 공간을 갖췄고 시설 역시 최신식이다. 하지만 저녁 8시 반 소등에 1박2식에 1만 엔이라는 비용을 보니 어쩐지 쉽게 정이 가지 않는다. 산장 바로 앞의 공터는 전망대 역할을 하는 곳이다. 특히 야경이 좋아 밤하늘에 뜬 많은 별과 함께 도시의 불빛까지 함께 즐길 수 있다.

다음날 새벽, 철사다리를 타고 야리가다케 정상에 올라 일출을 봤다. 먼 산에서 뜨는 해는 조금 심심했다. 확실히 해돋이는 카사가다케가 한 수 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른 식사 후 곧바로 하산에 들어갔다. 저녁 6시 비행기를 타려면 한시도 지체할 수 없었다. 모두 내리막이라고 하지만 가미코지까지 22km나 됐다. 7~8시간은 족히 걸릴 것으로 예상됐다.

산장을 나서자마자 긴 설벽이 나타났다.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바위가 드러난 곳에는 길이 있었지만, 눈이 덮인 곳은 그냥 치고 내려가야 했다. 그래도 경사가 위험할 정도로 가파르진 않아 차츰 적응이 됐다. 미끄럼을 타다가 걷다가를 반복하며 2시간 가량 내려서니 계곡물이 시작되는 지점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길에 앉아 아이젠을 차고 있었다. 해발 1,500m 가까운 고도를 오르기 위해 준비하는 것이다. 이들의 목적지는 우리가 조금 전에 출발한 야리가다케 산장이다. 오르려는 사람과 내려가는 이들이 교차한다. 이곳을 지나면 전형적인 계곡길이 시작된다. 차갑고 투명한 계곡물이 흘러넘치는 오솔길을 따라 진행했다. 야리사와 산장을 지나니 숲은 더욱 깊어졌다. 주변에 솟은 산 위에는 아직도 하얗게 눈이 쌓여 있다. 스위스 산골의 한적한 풍경과 똑 같은 모습이다. 이곳을 북알프스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아름다운 풍광 때문이다.

오쿠히다에서 시작한 이번 2박3일 산행은 동계등반에 버금가는 난이도로 제법 고생스러웠다. 눈이 녹지 않아 길은 없었고 초반에는 날씨까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위험스런 눈길을 치고 오르고 난 뒤의 만족감은 상당했다. 나쁜 날씨는 오히려 변화무쌍한 구름과 운해로 보답을 받아 전화위복이 됐다. 이번 북알프스 산행은 평소 느끼기 어려운 큰 감동의 기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