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주능선코스

2007. 12. 1. 09:25국내산행정보/....국내산행 정보


 주능선 종주 코스


노고단산장 (4㎞)→(1:20분) 임걸령 (3.5㎞)→(0:40분) 노루목 (0.5㎞)→(0:10분) 삼도봉 (2㎞)→(0:30분) 화개재 (2㎞)→(0:40분) 토끼봉 (3㎞)→(1:00분) 총각샘 (3㎞)→(0:50분) 연하천 (1㎞)→(0:20분) 삼각고지 (5㎞)→(1:20분) 구벽소령 (2㎞)→(0:30분) 신벽소령 (4㎞)→ (1:10분) 선비샘 (5.5㎞)→(1:40분) 영신봉 (0.5㎞)→(0:20분) 세석산장(1㎞)→(0:30분) 촛대봉 (3.5㎞)→(1:00분) 연하봉 (5.5㎞)→(1:00분) 장터목 (0.7㎞)→(0:20분) 제석봉 (1.8㎞)→(0:30분) 통천문 (0.5㎞)→(0:20분) 천왕봉

총거리 45㎞   (편집자 덧붙임: 최근실측 25.5km : 2001.01.05 지리산관리공단 ; 실측은 다르나 소요시간은 비슷)
등정시간 13시간 20분 / 역종주 12시간 00분


남한 최장 최고 능선의 장쾌한 마라톤 산행 110여리


지리산 서쪽의 최고봉 노고단에서 지리산 정상인 천왕봉까지 장장 110여리가 넘는 남한 단일 산의 능선등반 코스 중 최장, 최고의 코스다. 해발 1,300m~1,900m의 고봉준령을 넘나드는 45㎞의 긴 장도이기 때문에 체력과 함께 사전준비에 당연히 빈틈이 없어야 한다. 등정 하산거리까지 합치면 보통 50~60㎞가 넘는데 일정상으로 2박3일~3박4일이 다소 벅찰 지경이다. 하지만 능선 곳곳에 샘터와 산장, 야영장이 알맞게 위치하고 등반로도 뚜렷하며 아울러 만약의 경우에 대비할 수 있는 하산길도 중간중간에 많이 있어서 큰 불편은 없는 편이다.

가장 일반적인 등정?하산 코스로는 화엄사계곡 코스, 백무동 기점의 하동 바위 코스와 한신지계곡 코스, 중산리 계곡 코스와 법계사 코스, 대원사 계곡 코스 등이 있다.

전망좋고 유서 깊은 명소가 즐비

이 능선 종주 코스는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와 여러갈래의 지능선, 숱한 계곡을 두루 살펴볼 수 있어 전망이 뛰어나고, 변화있는 등반길과 색다른 지형 그리고 유서깊은 사연을 안고 있는 명소가 즐비하여 사시사철 같은 길을 걷더라도 항상 색다른 풍치를 자아내고 상큼한 감흥에 젖을 수 있다. 3일~4일간 산과 대화하며 걷는 맛도, 또 완주를 해냈을 때의 뿌듯함도 결코 적지 않아 많은 사람들은 고귀하고 추억어리 이 지리산 종주산행 경험을 오랫동안 가슴속 깊이 간직하게 된다.

지리산 등반의 대명사격에 해당되고 또 마라톤 산행에 비유되기도 하는 이 주능선 종주는 여러 사정상 대체로 연휴나 휴가철 아니면 찾기 힘든 장거리 산행인데 여담이지만 1980년대 들어서부터 이것을 극복하는 하나의 새로운 유형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틀 사흘씩 걸리는 주능선 종주를 하루 만에 해내는 일종의 기록등반이 바로 그것이다. 최근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아예 주능선을 왕복하고 화엄사로 빠지는 약 100㎞ 거리를 무려 15시간대 이내에 수행해 낸 그룹도 있었다고 하는데 보통인으로서는 상상키 힘든 일이다. 하여튼 일반 산행속도보다 몇 배나 빠르고 몇 곱절의 체력소모를 감내한 이와 같은 괴이한 산행(차라리 주행이 옳을까)도 여러 가능성에 도전하는 나름의 시도라는 점에서 분명 의미와 이유가 있을 듯 하다(필자가 얼핏 [기네스북]의 속보행군 기록을 살펴본 바로는 물론 각기 처했던 상황, 여건이 다르지만 앞서의 기록이 [기네스북]에 적힌 미국 병사들의 60여㎞, 11시간대 기록보다 빠르다).

그러나 자연과의 정서적 교감을 이루어내는 산행문화 속에서 어찌 보면 스포츠화된 이런 기록산행을 필자로서는 굳이 권장?옹호할 생각은 없다. 각설하고 주능선 종주 첫 기점인 노고단에 대해 알아보자.

첫 기점 노고단은 옛 신단자리

노고단은 서남방향으로 경사 17~18도로 완만하게 전개된 약 100여 정보의 고원지대이다. 해발 1,507m 노고단은 일명 길상봉으로도 불리는데 신라시대 때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 선도성모를 지리산 산신으로 받들고 나라의 수호신으로 모셔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선도성모의 높임말인 노고와 제사를 올리던 신단이 있었던 곳이라는 뜻으로 '노고단'이라 부르게 되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제사>(祭祀) 부분에 보면 "삼산(三山)과 오악(五岳) 이하의 명산대전에 대사(大祀), 중사(中祀), 소사(小祀)의 제사를 나누어 지냈는데...... 중사(中祀)를 지내는 오악(五岳)은 동쪽 토함산, 남쪽 지리산(地利山), 서쪽 계룡산, 북쪽 태백산, 중앙 부악(父岳, 지금의 팔공산)이었다"라고 적혀 있어 신라 때부터 지리산을 남악(南岳)으로 지정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제사를 올리던 명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제사를 올리던 곳이 노고단이며 남악사(南岳祀)라고 전하는데 그럼 이처럼 나라의 안녕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신라가 국가적 차원에서 올린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관해 사학자 이이화 씨는 이런 국가의식은 그때 당시 민중들이 받들던 성모신앙(聖母信仰) -민간에서 떠돌던 무속신앙의 큰 흐름- 과는 다르고 또 남악사를 세운 뜻에는 민중들의 별도의 성모사당인 성모사를 누르기 위한 면도 있었을 것으로 분석한다. 그렇다면 결국 신라가 시조의 어머니를 받들어 모시는 남악사를 세운 의미는 이전까지 민중들 차원의 성모신앙을 국가적 차원에서 흡수하고 또 화해하려는 제스쳐가 아니었던가 하고 추측해볼 수 있다. 어찌 됐건간에 신라때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지리산에 단을 쌓고 지내던 지리산 제사의 전통은 고려, 조선조까지 변함없이 면면이 이어져 내려온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威肅王后)를 산신으로 받들어 모셨는 데 장소는 노고단이 아닌 천왕봉과 휴천면 남호리 쪽으로 옮겨간 듯하다. 조선시대 세조 2년(1456년)에 노고단 남악사가 구례군 산동면 내산리의 평지로 옮겨져 제례가 행하여졌는데 일제시대에는 이러한 관(官)주도의 남악사 제례가 일체 중지되고 지금 남악사는 1969년에 화엄사 앞으로 옮겨와 구례군 축제일에 약수(거재수 물)를 바치며 제를 지내고 있다.

민족사와 함께 변모해온 노고단

신라시대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이었다고도 얘기되는 노고단은 한편 일제시대때 미?호주 외국인 선교사들의 피서용 별장 52동이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한여름에도 시원하고 맑은 물이 샘솟아 내를 이루며 흐르는 노고단,후련한 전망과 빼어난 경관 등이 피서지로서 더할 나위없이 좋았을텐데 호텔,공회당, 교회당 등을 비롯하여 발전소, 영화관, 간이 풀장까지 구비되었다고 전한다. 한편 대개 마음씨 고운 선교사 양반네들이 주된 이용객으로 매년 수백 명씩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그러나 벽안(碧眼)의 서양인을 4인거에 태워 이를 지고 힘들게 노고단까지 오르내렸을 구례지방 조선인 인부들의 모습이 누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 유쾌한 장면은 아니었을 것 같다. 나라 잃은 식민지 때, 천하절승 지리산의 중요한 모퉁이마저 홍콩식 조차계약으로 다시 외국인들에게 할당해주어야만 했던 그 서글픈 시대상황 때문에서도 말이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발발한 이후 근 한 달간 이상 김지회의 반란군들이 이곳 별장촌을 근거지로 삼았다고 하여 그후 국군 토벌대가 다시 들어와 점령하면서 빨치산 거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불태워버려 지금은 그 옛 건물 흔적만 공허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1948년 12월쯤 별장 건물들이 불타 파괴되면서 이 당시 노고단 주변의 수목들도 때아닌 피해를 입어 지금도 노고단 일대에는 큰 수목이 보이지 않고 싸리나무 등 관목류만이 앞다투어 자라고 있다.

예로부터 노고단 주변에는 종석대(鐘石臺), 관음대(觀音臺), 만복대(萬福臺), 집선대(集仙臺), 문수대(文殊臺), 청련대(靑蓮臺) 등 명승지가 산재해 있었다고 전하는데 이 중에서 종석대, 만복대, 문수대, 청련대의 지명은 지금도 찾을 수 있다. 관음대는 결국 종석대와 같은 것으로 보이며 집선대는 화엄사계곡 상류 쪽에 지명이 남아 있지만 미심쩍기도 하고 청련대는 노고산장 남쪽 400m 지점 일대의 바위군을 말하는 것 같다. 노고단에서는 또한 전망이 좋아 멀리 무등산이 확연하고 어떤 사람은 맑은 날 한라산까지 보인다고도 말한다.

봄철의 진달래?철쭉, 여름철의 원추리 군락 등도 장관인 노고단의 정상을 올라와보면 주능선의 웅대한 자태와 함께 남쪽으로는 섬진강의 물줄기가 흰 곡선을 그리며 흐르는 것이 마치 한 폭의 산수화와 같이 느껴진다. 현재 노고단 정상 일대에는 KBS?MBC방송 송신탑과 그 부속 건물이 있고 청학동 도인들이 3일간 공들여 쌓은 거대한 돌탑(케룬)이 서 있다. 얼마 전까지 통신부대가 상주했으나 지금은 철수하고 없고 옛 막사와 철조망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문명은 가혹하게도 '반란의 산'을 보복했다

노고단 고원 중앙부에는 현대식 야영장 및 부대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으며 200명 수용규모의 붉은 벽돌로 지은 3층건물 노고산장이 있다. 1988년 1월경 완공된 이 현대식 산장은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직영하고 있는데 난방용 히타와 자판기까지 구비하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돈만 있으면 취사장비, 야영장비 등 거의 모든 것까지 대여해주는 셈이다. 실용적이고 자본주의적 냄새가 짙은 산장이다. 전에는 그 옆 좌측에 40여 평 규모의 단층 슬라브 산장이 함태식 씨를 관리인으로 해서 운영되었다. 내무부 예산으로 1971년 건립된 이후로 털보 함태식 씨는 어떤 때는 지나친 간섭이라고 욕 먹을 정도로 산행질서를 바로잡는 데 헌산하고 노력한 결과 한동안 '조용하고 깨끗한 노고단' 시절이 있었다. 아직도 많은 산악인들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때와는 달리, 그리고 지금은 새 산장이 들어서면서 피아골 산장으로 좌천?추방당한 함선생의 처지와는 달리, 요즘 노고단은 마치 복작대는 어느 저잣거리를 연상케 한다.

반란의 산, 반역의 산, 지리산이 어쩌면 필연적으로 감당해야 했을지도 모를 '성삼재 도로'라는 문명의 보복행위 때문에 가장 직접적이고 첨예한 변화를 맞이한 곳이 바로 노고단이다. 2차선 관광도로가 노고단 턱밑 3㎞ 아래 지점까지 과감하게 뚫리고 포장이 완료되면서부터 연휴나 휴가철만 되면 도로를 가득 메운 관광버스와 각종 차량들로 장사진을 이룬다. 이들 차량을 이용하여 수많은 행락객들이 손쉽게 해발 1,500m의 산정까지 몰려들어 노고단은 어느 여타 유원지와 다를 바 없을 정도다. 지리산 관광 대중화시대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음을 알리는 서곡치고는 너무도 장송곡풍이 아닐 수 없다. 주차장이 모자란다 아우성치니 대뜸 종석대 발목을 대패질하듯 깎아내리고 위락 시설 부족을 즐비한 가건물 상점들이 대신 메꾸어주는 진풍경이 속출하는 오늘의 노고단은 곧 남한 유일의 해발 1,500m 산상도시일 뿐이다.

노고단 고개에서 반야봉과 첫 인사

노고단산장 우측으로 난 계단길을 오르면서부터 주능선 등정은 시작된다. 좌측에 옛 별장건물의 앙상한 골격이 보이고 몇 년 전 새로 조림한 잣나무가 많이 있는 오르막길을 오르면 점차 진달래, 철쭉이 나타나다가 곧 노고단 고개에 이른다. 여성의 엉덩이로 짓궂게 표현되는 반야봉이 드넓은 가슴을 드러내고 심원계곡이 한눈에 들어오는 이곳에서 오른쪽 산판도로를 따라 20여분 오르면 노고단 정상에 이르게 되지만 등반로는 바로 산기슭으로 내려서서 노고단 북쪽사면을 횡단하듯 가게 된다.

참나무 숲이 울창하여 터널을 이룬 편한 길이 계속되고 약 20여 분 정도 가면 평편한 공터가 나오는데 이곳이 바로 장승터이다. 1988년 11월 6일 제1회 '민족통일 대장군'과 '민중해방 여장군'등 장승 2기가 있던 곳이다. 당초 임걸령 샘터 남쪽 공터에 세우려 했지만 운반의 어려움 때문에 이곳에 세웠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89년 5월경 누군가에 의해서 전기톱질을 당해 사라져버리고 없다.

하늘을 가린 빽빽한 참나무숲을 잠시 걸어서 나오면 전망이 탁 트이면서 능선 평지길이 나온다. 진달래가 군락을 이룬 곳인데 여기서 잠시 뒤돌아보면 노고단 정상에서 내려오는 희미한 길과 만나는 곳에 돌무더기와 비슷한 곳이 있다. 지난 1970년대초쯤 고교생 3명이 세석에서 노고단을 향해 겨울등반을 하던 중 폭설 속에 갇혀 조난당해 결국 그 중 한 학생이 동사한 사건이 있었다. 그때 비명에 간 학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리산악회에서 세운 비목이 있던 자리이다. 봄이면 진달래가 거대한 화원을 이루는 피아골과 심원골 사이의 이 능선을 비목령(지도상에는 '돼지령'으로 적혀있기도 하다)으로도 부른다.

이곳은 또한 왕시루봉 능선의 섬세한 굴곡과 만복대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고 피아골과 심원계곡이 장쾌하게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능선길이며 완만하다. 1,424고지를 거쳐 구상나무숲을 지나오면 가을철 억새가 춤을 추는 돼지평전을 가로지른다.

초적들의 근거지였던 임걸령에는 맑은 샘이

마치 포근한 엄마 품을 연상시키는 반야봉이 돼지평전 억새밭 너머로 떠받쳐 있는데 '돼지평전'이란 어원은 마늘모양의 원추리 뿌리를 멧돼지들이 종종 파먹던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 돼지평전을 지나면 진달래 군락이 다시 한 차례 나타나다가 싱그러운 초원지대인 잘룩한 능선안부를 거치게 된다. 어렵지 않게 구상나무, 잣나무숲으로 들어서면 피아골계곡으로 빠지는 임걸령 삼거리가 나오고 평탄한 숲길을 따라 얼마 안 가 임걸령 샘터가 이어진다. 조선 명종(明宗) 때의 초적두목 임걸년(林傑年)의 이름에서 유래된 임걸령(林傑嶺)은 아늑하면서도 맑은 물이 솟아 야영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임걸년에 관한 자세한 내력은 알 수 없지만 이곳에 진을 치고 군사와 말을 길렀다고 하는데 실제로 임걸령 부근에서는 마구와 활촉 등이 발견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임걸령 샘터에서 피아골 쪽 암벽 밑에는 황호랑이 막터라는 곳이 있다. 옛날 약초꾼 황장사가 겨울에 이곳에서 자다가 기발한 지용(智勇)을 발휘하여 큰 호랑이를 잡았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주능선 등반구간 중에서 노고단~임걸령 4㎞가 가장 편한 코스에 속하는데 옛날 화랑들이 말을 타고 달려 화살보다 더 빨리 도착했다는 과장된 전설이 있을만큼 순탄한 편이다. 임걸령에서는 다소 경사 급한 오르막길을 올라야 하는데 얼마 안 가 다시 평지 능선길이 펼쳐진다. 산죽과 단풍나무, 잣나무,구상나무 등이 울밀한 숲을 가다보면 노루목이 나온다. 노루들이 지나다니던 길목이란 의미도 되지만 그보다는 반야봉의 지세가 피아골 방향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리다 이곳에서 잠시 멈춰 마치 노루가 머리를 치켜들고 있는 암두(岩頭)를 이루고 있어서 노루목이라 부른다고 한다. 노루목에서는 좌측으로 반야봉을 오르는 길과 우측의 반야봉 남쪽사면을 횡단하는 갈림길이 전개된다.

사방으로 거침없는 전망, 반야봉

좌측길을 통해 약 40여 분 오르면 반야봉 정상인데 구상나무숲이 울창하고 진달래, 철쭉이 꽃동산을 이룬 곳을 지나 싱그러운 초원길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지리산 3대 주봉(-천왕봉, 반야봉, 노고단)의 하나로서 지리산 중앙부에 위치하는 반야봉은 불교적 의미로 보면 지리산의 주봉이 된다. 지도상으로나 혹은 먼 곳에서 조망하더라도 두개의 연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지금 반야봉 표석이 있는 곳은 일명 '반야봉 상봉'이라고 불리며 헬기장을 거쳐 북쪽에 있는 또 하나의 봉우리는 '반야봉 중봉'이라고 불린다) 6?25 당시 각종 포탄이 정상부에 작렬했는지 대머리처럼 초원과 노출된 일부 암석 등이 보이고 구덩이도 많다. 지리산 중앙부에 위치하여 사방으로 거침없는 전망이 아주 좋은 반야봉은 넓은 산자락 속에 숱한 골짜기를 품고 있어 봉우리라기보다는 차라리 단일한 산이라 말할 수 있다. 반야봉 자락 부근에는 희미한 길들이 어지럽게 얼크러져 있지만 찾는 이는 드문 편이며(반야봉을 중심으로 한 등반로는 3곳 정도 있다. 이 중 심원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데 원시림과 전망 좋은 능선길이며 돌고개로 빠지는 7㎞코스와 소위 '심마니능선'이라 불리는 반선으로 빠지는 긴 능선 코스는 아직은 험로를 헤치며 나가야 하는 어려움이 따른다.) 주능선에서 떨어져 나와 벅차게 올라서 다시 되돌아 내려와야 하는 저 때문인지 두 번 이상 찾기조차 힘들다. 남성적 명칭에 여성적 면모를 지닌 반야봉 주변의 울창한 원시림은 보기 힘든 장관이고 겨울철 흰 눈을 뒤집어쓴 설산의 모습은 두려움마저 느끼게 한다.

옛날 지리산 반야봉에 올랐던 서경덕이 읊은 시조 한 수를 감상하자.

지리산은 우뚝 솟아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
올라가 보매 마음 눈이 끝없이 넓어지네.
험한 바위는 장난한 듯 솟아 봉우리들이 빼어났으니
아득하기만한 조물주의 공을 그 누가 알랴.
땅에 담긴 현묘한 정기는 비와 이슬을 일으키고
하늘에 머금은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
산은 다만 나를 위하여 구름과 안개를 걷어내니
천리길을 찾아온 정성이 통한 것일까.


반야봉을 올라 하산할 때는 노루목으로 내려오기 약 300m 전방에서 좌측으로 갈림길이 나 있으므로 거기를 지나 이름 모를 무덤을 거쳐 진달래 군락을 오르면 삼도봉(三道峯)에 도착한다. 삼도의 경계를 이루는 암봉, 삼도봉은 일명 날라리봉으로 적기도 한다. 지리산의 많은 봉우리 이름 중에서 가장 천박한 느낌을 주는 유일한 명칭인데 연유는 이렇다. 삼도봉의 바위 모양이 낫날 같다 하여 '낫날봉'이라 하던 것이 와전되어 '날라리봉'으로 되었다고 하고, 달리 삼도봉 주위의 봉우리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 처음 명명할 때 '나란이봉'이던 것이 '닐리리봉', '날라리봉'으로 변했다는 얘기도 있다. 어찌 됐든 주위의 아름다운 풍경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설픈 명칭은 달리 부르는 게 합당할 듯하다. 삼도봉에서 보이는 전망 역시 훌륭한데 불무잔등 능선과 피아골계곡이 내려다 보이고 건너편에 토기봉이 복스럽게 걸려있다. 삼도봉에서 바위 벼랑 밑을 비껴 내려오면 경사 급한 내리막길이 투박하기 그지없고 어느덧 헬기장이 있는 넓은 공터에 도착한다. 지리산 종주 코스 중 가장 저지대에 속하고 뱀사골계곡 상류에 소금장수가 발을 헛디뎌 빠졌다는 '간장소'에 얽힌 전설도 있는 걸로 보아 화개장터를 거친 해산물과 소금 등이 운봉, 마천, 산내지방의 내륙 특산물과 함께 이 길을 통해 거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옛 물물교역 루트인 화개재를 지나면 토끼봉

화개재에서 남쪽계곡(칠불사계곡, 연동골)을 따라 희미한 길이 나 있는데 범왕일 목통마을에 닿는 이 길은 뱀사골산장 물품을 나르는 길로 이용되고 있다. 북쪽 뱀사골계곡 쪽으로 200m 내려가면 뱀사골산장과 함께 샘터가 나온다.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오르는 길은 점차 경사를 더해가는 힘든 길이지만 울창한 구상나무, 전나무숲을 거닐어 진달래 관목지대가 펼쳐지는 정상에 오르면 전망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또 4월말경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는 진달래가 토끼봉 정상을 온통 붉게 물들여 진한 꽃내음에 흠뻑 취할 수 있는 곳이다. 뒤돌아보면 듬직한 반야봉과 뒤쳐져 따라올 듯한 노고단이 훤하고 천왕봉, 세석, 명선봉으로 이어지는 지리연봉의 위용도 가관이다. 토끼봉이란 명칭은 주변에 토끼가 많다거나 봉우리가 토끼 모양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고 반야봉을 기점으로 동쪽, 즉 24방위의 정동(正東)에 해당되는 묘방(卯方)이라 해서 토끼봉(卯峯)으로 부르는 것이다. 가끔 지도상에 이라 한자 표기한 것은 일종의 오기로 지적할 수 있다. 한편 토끼봉은 정상초원에 지보초가 군생하고 있어 일명 '지보등'이라고도 불린다. 토끼봉 남쪽 능선길을 따라 20여 리 내려가면 칠불사(七佛寺)가 자리잡고 있으며 이 능선길은 가끔 하산시 지름길로 이용되기도 한다. 토끼봉에서 하늘을 찌를듯 치솟은 구상나무숲을 내려서면 갖가지 잡목숲을 지나 완만한 능선안부에 이르렀다가 고목나무가 쓰러져 나뒹구는 경사길을 오른다. 능선 평지길이 한동안 계속되다가 돌밭길을 서서히 오르면 총각샘 이정표 앞에 도착한다. 이제까지 오던 길은 울창한 수해를 이뤄 더없이 시원하고 청량감있는 행보가 이어진 길이었다.

총각샘은 이정표 남쪽 언덕 너머에 있으며 커다란 벼랑 밑에서 신기하게 샘이 솟아나는데 지난 1970년 7월경 지리산악회 사람들이 수소문 끝에 발견한 샘이다. 옛날 심마니 노총각이 처음 알고서 이용하던 샘이었다고 하는데 이 소문을 듣고 재차 발견한 샘이다. 재차 발견한 사람이 지리산악회 노총각 2명이었기 때문에 혹은 심마니 노총각에서 각기 유래돼 총각샘이라 이름 지었지만 명명할 때는 장터목의 산희(山姬)샘이 여성적이라서 이것과 대비시킨는 뜻도 있었다고 한다. 총각샘은 갈수기에는 말라버리는게 흠인데 샘터 앞에 공터가 있어 야영은 가능하다.

총각샘으로부터 경사도 있고 힘도 드는 길이 나온다. 미끄러운 바위벼랑을 기듯이 오르면 차츰 완만해지다가 명선봉 부근의 울창한 침엽수림 지대를 지나면 내리막 흙길로 변하고 연하천산장에 이른다. 명선봉 능선길은 하늘을 가린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하여 숲속에서는 낙엽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데 숲속 평지 연하천(烟霞泉)에 이르면 마치 요정들의 별세계에 온 듯하다.

앙상한 고사목과 조화 이룬 '피의 능선'

해발 1,500m 이상의 고산지대답지 않게 맑고 시원한 물이 계류가 되어 흐르는 연하천은 남, 북, 서 3면이 아늑하게 감싸여 있는 숲속인데 주변에는 야영하기에 적합한 평지가 많고 공터에는 이름 모를 무덤도 보인다. 약 50명 정도 수용할 수 있는 연하천산장은 1982년 건립된 50평방미터 남짓한 아담한 건물이다. 연하천이란 서정적 느낌의 말을 굳이 해석한다면 '오묘한 대자연(烟霞) 속의 정취어린 샘(泉)'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여기 연하천과 연하봉(烟霞峯) 등은 지리산악회(전신은 연하반{烟霞伴})에서 명명하였다.

연하천 산장에서 동쪽으로 질퍽거리는 길을 가면 삼정리와 영원사로 가는 북부능선길이 좌측으로 나 있고 여기를 올라서면 전망이 탁 트이면서 삼각고지에 도착한다. 화개면, 마천면, 산내면의 경계점인 삼각고지에는 옛 6?25 당시의 벙커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여기서 내려다 보이는 남쪽 계곡이 남부군(南部軍) 총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이 최후를 맞이했다는 빗점골인데 삼각고지와 명선봉 일원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열하게 벌였는지 몰라도 혹자는 벽소령까지의 능선을 '피의 능선'으로 부르기도 한다. 앙상한 고사목과 기암이 조화를 이룬 오르내리는 능선길이 한동안 지속되다가 눈앞에 거대한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바라보이는 곳에 이른다.

높이 10m가 넘는 두 개의 바위가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이 입석바위를 형제바위라고 한다. 옛날 성불수도하던 두 형제가 산의 요정 지리산녀(智異山女)의 유혹을 경계하여 도신(道身)을 지키려고 서로 등을 맞대고 오랫동안 부동자세로 서 있었기 때문에 그만 몸이 굳어버려 지금의 모습이 됐다는 전설이 있다. 이 바위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자그마한 동굴이 자리잡고 있는데 '연하굴'이다. 비박 하기에 괜찮은 관통굴이다. 연하굴에서 두서너 개의 작은 봉우리를 넘나들다가 북쪽사면으로 내려서면 나무뿌리와 모난 돌길이 펼쳐지고 벽소령 공터로 나오게 된다.

지리 10경 중 벽소명월(碧宵明月)로 유명한 벽소령(일명 뱁실령)은 화개면과 마천면을 잇는 작전도로가 지나는 곳이다. 종주 등반 코스 중간지점에 해당되는 곳인데 이정표가 1㎞ 이상의 거리를 두고 동편과 서편에 각각 두 곳 있다. 서편의 벽소령을 '큰 벽소령', '구(舊)벽소령'으로 부르고 동쪽을 '작은 벽소령', '신(新)벽소령'으로 부른다. 벽소령의 샘, 뱁실샘은 구벽소령

남쪽 소로길을 200m쯤 내려가면 공터에 솟아나고 있다. 지난 1970년대초 작전도로가 뚫리기 전에는 능선 위로 등반로가 나 있었지만 지금은 넓고 편한 작전도로를 따라갈 수 있다. 잡목이 우거지고 낙석도 많은데 벽소령을 지나는 이 작전도로는 화개면 신흥에서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까지 연장 38㎞의 비포장도로이다. 작은 벽소령에서 능선 소로길로 올라 경사진 흙비탈길을 한참 오르면 전망이 트이면서 남쪽으로 깍아지른 듯한 깊은 골짜기가 눈에 선한 1,400m급의 봉우리에 다다른다.

"고원(세석고원)을 벗어나 주능선을 서쪽으로 8㎞쯤 가니 우뚝한 봉우리 하나가 나섰다. 꽃대봉(1,426m)이라는 그 이름은 여순사건 이후 제2병단 빨치 산들이 그 봉우리를 뒤덮은 꽃밭이 너무나 아름다와 그렇게 불려왔다는 얘기였다" (이태 지음 하권 81쪽에서 인용).

애틋한 전설을 지니 선비샘은 사라지고

꽃대봉이라는 이름의 봉우리에서 비교적 편한 길을 가다가 덕평봉 남쪽 사면을 돌아 내려가면 넓다란 평지와 함께 선비샘이 나온다. 옛날 선비샘 아래 상덕평(上德坪)마을에는 평생 가난하고 천대받으며 살아온 한 노인이 있었다. 이 노인의 유언이 죽어서라도 사람 대접 한번 받아보는 것이었는데 결국 아들들이 이 샘터 위에 무덤을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샘에서 물을 뜰 때면 반드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므로 결과적으로 이 노인의 무덤에 절하는 격이 되게 끔 하였다고 한다. 생전에 갖은 고생과 천대 속에서 화전민으로 살아온 한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실제로 몇 년 전까지 실현되고 있었는데 그러나 지금은 무덤도 안보이고 샘도 파이프로 연결하여 서서 받도록 조처하였기 때문에 이 씁씁한 전설은 잊혀진 얘기로 되어가고 있을 뿐이다. 선비샘에서 남쪽으로 상덕평을 거쳐 의신마을로 내려가는 약 7㎞의 지름길이 있다. 자칫 대성골 쪽으로 빠지기 쉬으므로 방향을 잘 잡아 비상시 하산길로 이용하면 괜찮을 듯하다.

선비샘에서 덕평봉을 다시 감싸듯 오르면 세석 영신봉까지는 수없이 오르내리는 힘든 구간이 연속된다. 울창한 숲길에다 간간이 대성골이 훤히 트이는 전망 좋은 쉼터도 있고 또 여름철 온갖 꽃들이 만발한 능선안부도 있어 지루한 감은 없고 아기자기한 산행의 맛이 더하다. 한참 가다보면 둘레에 7개의 암봉이 기묘한 조화로 우뚝 서 있는 칠선봉이 나온다. 마치 그 암봉들이 일곱 선녀가 노니는 모습 같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따로 이정표가 없으므로 유심히 살펴보기 바란다.

칠선봉에서 두어 번 암봉을 넘으면 북변의 경사 급한 바윗길이 나타난다. 노출된 나무뿌리에 의지하여 힘들게 이곳을 올라서면 영신봉이 바로 코앞에 다가선다. 영신봉에 오르면 사방이 두루 조망되면서 광활한 세석고원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온다.

꿈 같은 거대한 화원, 세석고원을 지나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고, 넓은 세석고원은 그 둘레가 12㎞, 약 30만 평의 면적을 차지한다. 작은 돌밖에 없는 토양지대라 해서 잔돌평전, 세석평전(細石平田)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일본식 표기이므로 세석고원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매년 5월말~6월초에 만개하는 수십만 그루의 철쭉이 장관인 세석의 식물대는 상?중?하 3대(帶)가 뚜렷하여 식물연구의 좋은 교육장 노릇도 하고 있다. 초원지대인 상대, 철쭉군락의 관목지대인 중대, 그리고 구상나무와 굴참나무의 하대가 등고선별로 분포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세석고원의 면모가 드러난 계기는 약 100년전(혹은 300년 전이라는 얘기도 있음) 큰 산불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15세기경 지리산을 찾은 김종직, 김일손 등의 기행문에서도 세석에 관한 어떠한 언급도 없는 걸로 보아 타당한 얘기 같다. 세석고원 서쪽사면에 자리잡은 세석산장은 1983년 66평방미터의 규모로 지어졌는데 6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산장 전에는 고 허우천 씨가 관리하던 구산장이 세석고원 중앙에 위치했지만 지반이 튼튼하지 못해 철거된 바 있다.

지난 1972년부터 매년 철쭉이 만발하는 시기에 진주산악회 주최로 '철쭉제'가 열리곤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이 몰려 대혼잡을 이루고 되레 철쭉이 훼손당하는 부작용이 따르자 폐지되었다. 지금은 야영장 정비공사와 등산로, 배수로 공사가 거의 완료단계에 와 있는데 그동안 그만큼 야영질서가 엉망이었다는 말도 된다.

세석산장에서 촛대봉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다. 폭 1~2m 정도로 잘 다듬어진 길이며 좌우로 철쭉꽃이 펼쳐지는 아름다운 길이다. 올망졸망한 바위들의 군집체인 촛대봉은 그 바위 모양들이 마치 촛농이 흘러내린 듯하다 해서 그렇게 부르는데 천왕봉이 가까이서 어서오라는 듯 반기며 한신골과 도장골이 시원스럽게 내려다 보인다. 촛대봉에서 잠시 비탈길을 내려서면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린 아기자기한 능선길을 타게 된다. 지도상에 나와 있는 삼신봉을 확인해볼 겨를 없이 지나치고 들꽃이 만발한 능선안부(헬기장이 있는 곳)를 지나면 연하선경(烟霞仙境)으로 유명한 연하봉에 이른다. 기암이 솟구쳐 있고 싱그러운 초원 위엔 온갖 꽃들이 화려하게 수놓는 전망도 일품인 곳이다.

호젓한 분위기에서 일출을 맛볼 수 있는 일출봉

연하봉을 넘어서면 평탄한 초지 능선안부를 거쳐 넓고 평탄한 봉우리에 올라서는데 도장골이 길게 패여진 모습이 환하고 남쪽방향으로 지능선이 하나 뻗어 내려간다. 소위 '일출봉'(日出峰)이라 부르는 곳이다. 장터목산장에서 천왕봉 일출을 보려면 다소 멀기도 하고 더구나 날씨마저 장담할 수 없는 날이면 괜한 헛걸음이 되기 일쑤여서 아예 포기하기 십상인데 이럴 때 이곳 일출봉을 한번쯤 찾는다면 좋을 듯하다. 장터목에서 20분도 채 안되는 거리에 있고 또 기암과 고사목이 어울린 수려한 경관 속에서 무엇보다 호젓한 분위기에서 일출을 맛볼 수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일망무제격으로 탁 트여버린 천왕봉의 일출이 차라리 단순하고 산문적인 느낌마저 든다면 이곳 일출봉에서는 죄측에 듬직하게 천왕봉의 암영을 걸어놓고 있어서 더욱 운치가 있다. 번잡스럽고 부산한 장터목의 새벽, 그 흐트러진 분위기 속에서 더구나 고행의 길을 1시간여 올라야 하느니보다 차라리 간이 화장실과 야영할 곳도 넉넉한 이곳에 베이스 캠프를 설치하고 느긋하게 일출을 감상하시길.....

일출봉에서 숲길을 걸어 내려오면 옛날 시천(矢川)주민과 마천(馬川)주민들 이 물품교역을 하던 곳이라는 장터목{場基項)에 이른다. 5개 방향으로 등반로가 연결되고 더구나 천왕봉을 오르려는 일종의 전초기지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노고단 다음으로 지리산에서는 번잡스러운 곳인데 주변에는 무분별할 정도로 야영장이 수없이 파헤쳐져 있다. 장터목산장은 지난 1971년 9월에 처음 세워질 때 지리산장이라는 이름으로 33평방미터, 40명 수용의 반(半)지하식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졌지만 지금은 폐쇄되고 대신 82평방미터, 80명 수용의 새산장이 목조 2층 마루방으로 1986년 9월 문을 열었다. 그나마 폭증하는 많은 등산객을 수용하지 못해, 휴가철은 물론 눈이나 비가와 야영하기가 불편한 날에는 심하게 붐비는 곳이다.

장터목샘(일명 '산희샘')은 중산리 쪽 20m 아래에 위치하며 역시 많은 사람이 길게 줄 서서 식수를 받으려고 애타게 기다리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산희샘이란 명칭은 지리산악회 회원 안기호(安琦浩) 씨의 따님 이름 산희(山姬)에서 유래되었으며 이곳에서 동쪽으로 20여 분 못 간 곳에 천왕봉 성모사에 향화(香火)를 받들었던 향적사(香積寺) 터가 있다.

제석봉 비탈 횡사목의 처참한 사연

장터목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산장 우측으로 경사 급한 돌밭길을 오는데서 시작된다. 구상나무숲과 기암이 보이다가 어느덧 고사목과 황량한 초원지대 제석봉(帝釋峰)이 나오는데 이 처참한 몰골의 사연을 들어보면 가관이다. 6?25 후까지만 하더라도 아름드리 전나무, 구상나무들이 울창하였던 제석봉은 자유당 말기 당시 농림부 장관의 삼촌되는 자가 권력을 등에 업고서 제석단에 제재소를 차려놓고 거목들을 베어내면서부터 수난을 당한다. 그러다가 후에(이 도발 사건이) 여론화되고 말썽이 나자 증거를 인멸할 양으로 제석봉에 불을 질러 나머지 나무들마저 지금과 같이 횡사시켜버렸다.

불법적 도벌과 이를 은폐하기 위한 인위적인 방화로 지금의 제석봉이 되었다는 얘기인데 멀리서 제석봉을 바라보노라면 마치 천왕봉 턱밑에 흉칙한 마른 버짐 자국이 생긴 것처럼 볼상사납기 그지없다. 자연 스스로의 노쇠과정 속에서 운치나 있을 고사목이 아니라 횡사목이라는 데서 그 어떤 미적 세계도 발견할 수 없는 지리산 임상 수난사의 처연한 기념물인 셈이다. 그나마 몇 그루씩 남아 있던 횡사목들마저 점차 쓰러져가고 있어 결국 얼마 안 가 제석봉 일대는 황무지로 변할 듯하다. 또 비만 오면 물을 머금지 못하고 그대로 흙탕물을 토해내는데 이점 때문인지 장터목샘과 제석단샘도 갈수기에는 종종 물이 고갈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결국 지리산을 갉아먹으면서까지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었던 일부 인간 송충이들 때문에 오늘날 지리산을 찾는 수많은 후손들이 더욱 목말라하고 있어 그 화를 톡톡히 입고 있는 셈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함태식 씨가 노고단 구산장 관리인으로 있을 당시, 모 종교집단이 노고단에서 제를 지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제물로 돼지와 닭을 근처 샘터에서 잡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후 그 맑던 샘물이 뿌옇게 변하면서 얼마 후에는 고갈되어버리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아마도 신성한 샘물, 그 근원에서 피를 뿌리는 일을 벌였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벽소령 작전도로 확포장 문제로 얘기를 나누던 중 자연의 섭리와 결부시켜 함태식 씨가 필자에게 들려주던 일화인데 지금도 그는 그 일을 생각할 때마다 두고두고 후회가 든다고.

제석봉 이정표에서 철사다리를 내려서면 좌우로 암벽 비탈길이 고산지대 특유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소위 '톱날능선'이라 부르는 암봉연릉길이 이어진다. 한 능선안부를 거쳐 얼마 오르면 칠선계곡 원시림 장관이 눈에 들어오고 통천문(痛天門)에 이른다.

통천문을 비집고 승천하다

예로부터 부정한 사람은 오르지 못했다고 하는 하늘에 오르는 길목, 통천문은 깍아지는 벼랑 속으로 작은 통로가 있어 그 사이를 비집고 오르게 되어 있는데 몇 해 전까지 허우천 씨가 설치한 나무사다리로 힘겹게 오르던 길이었지만 지금은 철사다리를 타고 갈지(之)자로 편하게 오를 수 있다. 통천문 위로 해서 잠시 평탄한 길이 나오다가 거대한 암벽비탈과 만난다. 우측으로는 사태난 듯 아찔한 낭떠러지기이고 그 옆의 튼튼한 쇠줄에 의지하여 스릴있게 오르게 된다.

천왕봉을 오르는 막바지 지점인 이곳 벼랑지대는 8?15해방 직전 엄청난 굉음을 토하며 붕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인근의 중산리(中山里)지역 사람들은 이 때문에 무슨 큰 변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는데 결국 일제가 망하고 우리 민족이 독립을 되찾게 된 일이 그것이었다. 남명 조식(曺植)의 싯귀에 "하늘은 울어도 천왕봉은 오히려 울리지 않는다"라는말도 있지만 천왕봉의 암석이 떨어져 나가면서 천왕봉이 울었으니 그렇게 생각 했음직도 하다. 그후에도 이곳은 여러 차례 붕괴돼 중산리계곡을 너덜지대로 만들어놓았는데 단순한 자연적 변동과정에서 뿐만 아니라 인위적 요인도 작용한 듯하다. 로타리산장 관리인 조재영( 52세) 씨는 통신골(일명 죽음의 계곡)일대에서 불법적인 수석채취가 행해져서 이런 붕괴사고를 빚었다고 말하고 갖가지 기계를 동원하여 암석을 잘라서 캐가는 이들의 단속 없이는 끝내 지리산을 완전히 망쳐버릴 거라고 경고하고 있다. 천왕봉 정상은 칠선계곡 등반로와 만나는 곳에 안내판이 있지만 100m쯤 더 가야 한다. 해발 1,915m로 남한에서는 한라산(1,950m) 다음으로 높은 지리산 최고봉 천왕봉은 하늘을 떠받치는 거대한 암괴로 이루어져 있다.

드디어 천왕봉

사방을 빙 둘러보아도 거칠 것 하나 없는 장쾌한 전망을 가진 천왕봉은 하늘에 닿을 듯 웅대한 기상으로 우뚝 솟아 있는데 행정구역상으로 보면 경남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 산 208번지와 함양군 마천면 추성리 산 100번지에 해당된다. 천왕봉 정상에는 몇 차례 푯말이 바뀌면서 지금은 "........ 1,915m", "한국인의 기상은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각각 양면에 음각된 높이 1m 정도의 타원형 돌비석이 세워져있다.

천왕봉 정상 서쪽 암괴에 '천주'-하늘을 떠받치는 기둥-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고 여기서 조금 내려온 능선 평지(공터)가 옛 성모사당이 있던 자리이고 그 아래 공터가(지금 철창이 성모상의 복귀를 기다리며 설치되어 있는 곳) 옛 산장터이다. 일제시대 때부터 토굴식 석조산장이 있었다고 하는데 6?25 이후에도 몇 년간 존속되었지만 지금은 자취를 찾을 길 없다. 천왕봉 정상에서는 야영할 만한 공간이 여러군데 있지만 식수가 없고 화장실도 없어 큰 불편이 따른다. 비록 법계사 쪽으로 500m 가파르게 내려간 곳에 천왕샘이 있지만 갈수기에 말라버리기 일쑤다.

천왕봉에서의 연계 한산코스로는 남쪽 법계사-중산리 코스가 가장 지름길로 많이 이용되고 장터목으로 다시 되돌아 내려와 백무동 쪽으로 하산하는 것도 부담없다. 동쪽으로 중봉-써리봉-치밭목산장-대원사 코스도 18㎞로 길지만 잡아볼 수 있고 날씨와 제반 여건만 허락한다면 북쪽 칠선계곡 코스도 택할 수 있다.

주능선 대장정을 천왕봉에서의 조망으로 마무리한다. 천왕봉에서 칠선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북쪽을 바라보면 함양읍내 건너 멀리 백운산, 덕유산 연릉이 연자색으로 둘러 있고 가까이 창암산, 법화산이 또렷하다. 중봉-하봉-도리봉 연릉을 넘어 북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감악산, 가야산의 암봉이 희끗희끗하고 동쪽으로는 응석봉의 기나긴 능선이 성곽처럼 누워 있으며 경호강 물줄기가 아른거린다. 남쪽으로는 첩첩이 요동치며 야산들이 끝없이 이어지고 멀리 남해 바닷가가 어렴풋하게나마 윤곽을 드러낸다. 서남방향으로 광양 백운산이 가물거리고 서쪽으로는 긴 곡선을 그리며 지리산 주능선이 뻗어 있고 반야봉, 노고단도 쉽게 어림된다. 서북방면으로는 인월, 운봉이 부분적으로 드러나며 멀리 성수산이 보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