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태산 그리고 노산

2007. 12. 17. 23:35중국/중국 동부 트레킹

 

산 동

   태산(泰山)

태산태산은 산동성중부도시 태안(泰安)시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우리나라 5악(五岳)중의 동악(東岳)이다. 예로부터 동방을 만물이 소생하는 곳으로 인정됐으므로 태산도 "5악의 으뜸(五岳之長, 五岳獨尊)이라고 불리웠다.

일찍 하(夏), 상(商)시대에 벌써 72명 군왕이 태산에서 제후를 반나고 제위를 정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하고 태산에서 제위에 오른후 한조의 한무제(漢武帝), 광무제(光武帝), 당조의 고종(高宗), 현종(玄宗), 송조의 (眞宗), 청조의 강희(康熙), 건륭(乾隆) 등도 그를 본받아 태산에 와서 대례를 치렀다. 그들은 태산에 절을 세우고 돌상을 조각했으며 글을 새겨 태산에 대량의 문물고적을 남겼다.

한편 태산은 또 불교와 도교가 성행하는 곳으로서 절과 풍경명승이 매우많다. 하여 태산은 웅위한 산세뿐만아니라 많은 문물고적이 있고 또한 도교(道敎)의 명산이다. 산꼭대기에는 또 해돋이(旭日東升), 저녁노을(晩霞夕照), 황하금띠(黃河金帶), 운해옥반(雲海玉盤) 등 4대 기이한 풍경이 있어 참으로 세계에서도 유명한 문물보장고와 유람명승지이다. 1987년말 세계자연과 문화자원보호위원회에서는 이미 태산을 《세계유산명록》에 수록했다.

태산을 유람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먼저 대묘(岱廟)를 거친다. 대묘는 태안성내에 위치해 있는데 남쪽의 태안문(泰安門), 통천가(通天街)로부터 북쪽의 태산반도(泰山盤道), 남천문(南天門)의 중축선(中軸線)에 까지 이르며 력대 봉건제왕이 대례를 치르는 장소이다. 대묘는 진조와 한조때부터 건설했으며 매우 많은 진귀한 문물이 남겨져 있다. 대묘의 주요한 대전 천황전(天籌殿)은 우리나라 3대궁전건축의 하나로서 북송때에 건설됐다. 대전 가운데 "동악태산신(東岳泰山神)"상을 모셨고 벽에는 "동악태산신순시(東岳泰山神出巡)"의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화면은 인물을 위주로 했으며 규모가 크고 인물부각이 매우 생동하다. 사실 대묘는 력사문물, 시, 회화, 서법, 조각예술을 종합한 박물관이라고도 할수 있다.

   곡부삼공(공묘, 공부, 공림)曲阜三孔(孔廟, 孔府, 孔林)

공묘곡부(曲阜)는 춘추시기 로(魯)나라의 수도이며 우리나라 사상가, 교육가, 유가(儒家)창시인 공자의 고향이다. 여기에는 풍부한 문화유산이 있는바 그중 가장 이름있는 것이 바로 중외에 이름날린 곡부삼공--공묘, 공부, 공림이다.

공묘(孔廟)

공묘는 곡부성내에 있는데 건축규모가 웅대하고 화려하며 우리나라에서 공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가장 큰 사묘이다.

공자가 서거한 이듬해(기원전478년) 로애공(魯哀公)은 공자의 옛댁을 절로 개조했는데 그후 력대제왕들이 계속 공자를 동봉(加封)하고 절을 확건했으며 청조에 이르러 옹정황제가 공묘를 지금의 규모로 건설했다. 공묘의 중점유람지는 중축선(中軸線)우의 규문각(奎文閣), 십삼비정(十三碑亭), 행단(杏壇), 대성전(大成殿) 및 력대 비석조각(碑刻)이다.

규문각의 이름은 28개 점성(星宿)중 문장의 성쇠를 주재하는 규성(奎星)으로부터 온 것이다. 규문각은 장서각(藏書閣)으로서 각내에 력대제왕이 공자에게 선사한 책들이 저장돼 있었는데 력대 전란을 겪어 장서가 대부분 없어졌다.

십삼비정은 대성문(大成門)앞쪽 동서량켠의 정원안에 세워져 있다. 십삼비정중 당, 송, 원, 명, 청 각조대의 황제가 하사한 여러가지 비석 53개 있어 봉건사회에서 공자의 숭고한 지위를 충분히 보여줬다.

행단은 대성전 앞복도의 가운데 있는데 공자가 강학하는 곳이라고 전한다. 행단옆에 고전(古檜)나무 한그루 심어져 있는데 "선생이 손수 심은 전나무(先師手植檜)"라 한다.

대성전은 공묘의 주요 대전이다. 당조때 "문선왕전(文宣王殿)"이라 했는데 송휘종(松徽宗) 조길(趙佶)이 공자를 "고대성현을 집대성(集古聖先賢之大成)"했다고 받들어 "대성전(大成殿)"이라 이름고쳤다. 대성전의 웅위한 건축과 화려한 장식은 전국의 공묘가운데서 으뜸일뿐만아니라 대전 앞처마에 10개 룡조각 돌기둥은 그 기세가 자금성을 앞도할 지경이다. 대전 가운데 공자의 조각상을 모시고 량켠은 사배(四配)와 십이현(十二哲)의 조각상이다. 대전앞 동서량쪽복도에는 력대 비석조각을 진력했고 침전(寢殿)뒤의 성적전(聖跡殿)에는 공자의 업적을 적은 120폭 명조 돌조각 련환화를 수장했다. 옛터 우물뒤(故宅井后)의 로벽(魯壁)은 진시황 분서갱유때 공자의 제9대 자손 공부(孔fu)가 《상서(尙書)》,《례기(禮記)》,《론어(論語)》,《효경(孝經)》를 수장한 벽장(夾墻)인데 후세사람들은 공부의 고대문화를 보호한 공적은 기념하기위해 이 로벽을 수복건설했다. 공묘에 수장한 대량의 비석조각은 그 수량이 서안비석림의 다음으로 가 우리나라 제2비석림이라 불리운다.

공림(孔林)공림은 공자 및 그후대의 묘원(墓園)인데 곡부성북에 위치해 있다. 공림은 부지면적이 3000여무에 달하며 원내에 고목이 첩첩하고 나무아래에는 무덤이 빼곡하다. 그중 공자. 공리(孔鯉), 공급(孔及) 3대의 무덤주위에는 주색 벽으로 둘렀다. 이밖에 해정(楷亭), 주필정(駐bi亭)이 있는데 황제가 공자에게 제사 지내러 올때 휴식하는 곳이다.

공부(孔府)공부는 서쪽에 공묘와 접해 있는데 공자세습 "연성공(衍聖公)의 직계 자손이 거주하는 곳이며 명조와 청조 황제궁실다음으로 가는 가장 큰 관저이다. 지금 공부의 부지면적이 240여무에 달하며 청(廳), 당(堂), 루(樓), 헌(軒) 등 여러 형식의 건축이 463채로서 동, 중, 서 세갈래로 나뉘여 있다. 동쪽갈래는 가묘(家廟)이고 서쪽갈래는 학원(學院)이며 중부갈래는 주체건축이다.

곡부는 중국력사문화명성으로 문물고적이 매우 많은바 상술한 곡부삼공이외에 로국고성유적지(魯國故城遺址), 주공묘(周公廟), 안묘(顔廟), 맹묘(孟廟), 소오릉(小吳陵) 등 명승이 있다.

봉래각(蓬萊閣)

봉래각산동반도에 위치해 있는 봉래각은 예로부터 "선경(仙境)"이라고 불리웠다. 전설에 의하면 한무제(漢武帝)가 수차 산동반도에 와 발해로 뻗은 단애산(丹崖山)에 올라 "봉래선경(蓬萊仙境)을 구했다고 후세 사람들은 이 단애산을 봉래라고 불렀다.

애산은 바다와 접해 있고 바다로 향한 면은 가파로운 절벽이다. 봉래각은 산정에 위치해 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궁전과 정자가 수풀과 어울리면서 산애우에 높이 세워져 마치 신화중의 신선궁전과 같다. 봉래각 고대건축군은 면적이 32000여평방메터에 달하며 려조전(呂祖殿), 삼청전(三淸殿), 봉래각(蓬萊閣), 천후궁(天后宮). 룡왕궁(龍王宮), 미타사(弥陀寺) 등 주요 건축들이 있다.

봉래각은 북송시기에 건설됐으며 량측에 관란정(觀瀾亭), 빈일루(賓日樓), 비풍정(避風亭), 와비정(臥碑亭), 강공사(姜公寺) 등 건축들이 있다. 봉래각은 남북향으로 된 쌍층 나무구조 건축으로 장식이 화려하고 색채가 매우 아름답다. 봉래각 밑층에는 16개 붉은새으로 된 기둥이 세워져 있고 웃층에는 유람객들이 멀리 바라볼수 있도록 정교한 주랑이 있다. 이곳에 오르면 마치 하늘과 바다사이에 몸을 둔 신선으로 된 감각을 가지게 된다. 여기에서 때로 "공중루각(海市蜃樓)"을 볼수 있다.

로산(lao山)

로산은 산동반도의 주요한 산맥으로서 최고봉의 해발고가 1133메터에 달한다. 로산은 황해변에 우뚝 솟아 매우 웅장하다.

산과 바다가 잇닿아 있는 산수풍경이 바로 로산풍경의 특색이다. 전국의 명산가운데 해변에 솟은 산은 로산 하나뿐이다. 로산을 에워싼 해안선길이가 87키로메터에 달하며 연해에 크고작은 섬들이 18개에 달해 로산의 기이한 해상경관을 이루었다. 전하는데 의하면 진시황, 한무제가 이곳에 찾아와 신선을 구했는데 이는 로산에 신비한 색채를 씌워줬다.

로산은 우리나라 유명한 도교명산인데 가장 번성한 시기에는 "구궁팔관칠십이암(九宮八觀七十二庵)"과 수천명의 도사가 있었다. 구장춘(丘長春), 장삼풍(張三豊) 등 유명한 도교인물들도 이곳에서 도를 닦은 적이 있다. 지금까지 보존된 도관(道觀)중 규모가 가장 크고 가장 오랜 것이 태청궁(太淸宮)이다.

태청궁(太淸宮)

태청궁을 하청궁(下淸宮)이라고도 하며 북송초기에 건설되기 시작해 이미 근 천년의 력사를 가졌다. 태청궁의 전반 건축은 "삼궁전(三宮殿)", "삼황전(三皇殿)", "삼청전(三淸殿)" 으로 구성됐으며 풍격이 소박하고 청아하다.

삼청궁은 삼면에 산이 둘러있고 한면이 바다에 접해 있으며 주위에 많은 경관과 돌조각이 있기에 로산유람구의 중심으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