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2. 12. 10:18ㆍ중국/중국 북부 트레킹
불교에서 '시방(十方)'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사물을 볼 때, 팔방(八方)과 상하(上下) 이방(二方) 등 10방향에서 세계나 사물을 다각적으로 판단하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와 대비되는 말로 한쪽 면만 보고 판단하고 고집하는 편견이라는 낱말이 있다. 대부분의 우리민족은 백두산과 천지에 대해 많은 편견을 갖고 있다. 옛날 고조선, 고구려, 발해 때는 우리 국토의 중심이었으나 고려 때는 의주에서 함흥 북쪽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쌓아 국경선을 삼았으며 조선 때는국경선이 분명하지 않다가 조선 숙종 38년(1712) 백두산정계비가 세워져 백두산과 천지는 우리 땅 밖이 되었다.
백두산 최고봉은 우리의 산인가? 중국의 산인가?
1712년부터 1962년까지 250년 동안은 누구도 백두산과 천지가 우리 국토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행히 1962년 '조중변계조약'이 조선과 중국 간에 체결되어 새로운 국경비 21개가 세워지고 백두산 최고봉인 백두봉(2750m)과 천지의 약60%가 송화강의 최상류 일대와 함께 우리 국토에 편입되었다. 실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현재 백두산의 최고봉은 분명한 우리나라(조선=한국)의 산이요, 우리나라의 봉우리이다. 중국측 최고봉은 백두산 천지 주변에 솟은 16개의 고봉 중 제4봉인 백운봉(2691m, 중국최고봉)이라고 서파의 중국 안내판에 기록되어 있다.
또 백두산(太白山)은 단군이 우리나라(고조선)를 세운 개국의 터전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중국 금국과 청나라는 청조의 발상지로 숭배하여 왔다. 즉 청나라 발상 전설에 '산정에 못이 있는데 포득호리지(天池)라 부른다. 천녀 자매 세명이 하늘에서 내려와 목욕을 하는 사이에 신작 한 마리가 묽은 과일을 물고 와 계녀의 우의에 놓았다. 막내딸은 이를 먹고 곧 한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포고리옹순, 성은 애친각라라 하였으니 이가 곧 청제실의 조상이다'고 하였으며, 금나라는 1172년 영응산이라 하여 제사를 지냈으며 청나라는 이 산을 왕조인 애친각라의 발상지라 하여 숭배하였으며 1677년에는 대신 각라식목눌을 시켜 시찰케 하였다.
그리고 1684년에는 장백산신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옹정제 이래 길림장군의 고나리하에 춘추 중월에 제사를 지냈다.
백두산 천지 분화구 내의 유일한 절 "종덕사"
백두산 천지의 물은 달문을 통해 북쪽으로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가는데 장백폭포까지 약900m까지를 승사하 또는 통천하, 천상수라 부른다. 달문부근 승사하를 건너면 동쪽언덕 위에 울울창창한 바위들이 솟아 있고 그 뒤쪽에 천활봉, 철벽봉, 천문봉 등의 산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천길 낭떠러지 같은 험난한 바위봉 위에 광활하고 초원같은 고원이 펼쳐 있고 이곳에 '조선족이 만들었다'고 전하는 종덕사(宗德寺)가 위치하고 있다. '여진족 왕이 백두산에 올라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여진 제대, 팔괘표라 부르는 이 절터는 장백산사, 숭덕사(崇德寺), 존덕사, 송덕사, 용왕묘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의 풍수사상에 '산은 남쪽이 양이고 물은 북쪽이 양이라'고 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그런 자좌오향(子坐午向)의 양지 바른 명당 터이다.
일찍이 최남선은 천지에 올라 '저기서 단군이 나오셨겠다. 저기서 동명이 나오셨겠다. …낙구 동쪽의 애각에 익연한 일옥이 건너다 보이는 것은 지나인(중국인)이 건설한 장백산묘로 용왕묘라고도 부르며 조선인 중에는 1년 혹은 2년씩 기도, 치성하는 이가 있다'고 그가 지은 <백두산근참기>에 기록하였다.
필자가 1991년 10월, 이곳을 찾았을 때는 절 건물 잔해가 수북히 쌓여 있었으나 현재는 주춧돌만 남아 있을 뿐이다. 수년 전(2002) 음력 설 다음날 실로 우연치 않게 '꿈의 학교'학생들과 함께 백두산 천지위, 4m의 얼음판에서 학생들에게 종덕사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오직 무량한 감격이 물밀듯 몰려올 뿐이었다.
그 동안 종덕사의 복원을 위해 동분서주했던 나날들! 한얼교 고 신정일 총재, 고 육관도사 손석우 지관 등 많은 사람들과 함께 복원을 시도했으나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기다리는 자에게는 반드시 기회가 찾아오리라고 확신한다.
'한배검 한울에서 내려오시니 / 거룩할사 배달의 대궐이시오 / 나라를 세우고 과화를 펴사/ 온 누리를 싸고 덮었네'라고 기록된 삼일신고(三一神誥)를 생각하며 '이 곳에 종덕사를 다시 세우자. 그리고 우랑도에 우랑교를 만들고 넓게 펼쳐진 초원에 천막을 치고 오고 싶은 사람은 누구나 와서 마음껏 천지를 느끼고 마음에 못이 박히도록 천지를 마음에 담아가게 하자'고 얼음 가득한 천지와 종덕사를 뒤로 했다.
한편 우리 겨레는 언제 어느 곳에서 백두산신에게 제를 지냈었을까? 1936년 조선일보사에서 민족대사업의 일환으로 단행했던 백두산탐험(단장 서식)은 표면상으로 '백두산근참'이라고 하였으나 속셈은 우리나라 시조 단군을 민족대표들이 뵈오러 가는 근참의 자세였으며 그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백두산 전면적의 9할 이상이 무산군 삼장면에 속하는데 삼장면의 중심은 삼장이다. 무산서 삼장이 1백리요 삼장서 백두산 정상 아래 자리잡은 농사동은 80리이다. 농사동에 이르기 약 십리 전에 천왕당이 있다. 이곳에는 천왕당, 홍단각 등 두 채의 건물이 있는데 주련에 존경당, 만고명산, 일국조종, 백두종기, 송단영사 등의 문구가 있고 건물 내 위패는 '대천왕영신지위-천왕이란 즉시 단군으로 족조(族祖)이자 국조(國祖)요 신인(神人)이자 천인(天人)이며 실로 조신 인문 일체의 출발점이며 결정체이다'라고 기록하였다.
이형석 백두문화연구소장 교육학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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