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비단산] 연해주 항일투쟁 발자취를 찾아서(출처:DBS훼리 홈페이지)

2011. 9. 2. 10:23중앙아시아·몽골·러시아/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일제를 떨게했던 애국지사의 숨결 생생

 /연해주 항일투쟁 발자취를 찾아서/ (상)독립운동가들의 면면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행 기차를 탔던 블라디보스토크역.◇전로한족 중앙총회가 열렸던 건물.◇이상설 유허비.◇최재형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던 집.(사진 위부터)

동해항 국제여객선인 이스턴 드림호의 러시아행 목적지인 블라디보스토크시 등지를 품에 안고 있는 연해주는 면적이 16만5,900㎢ 인구는 206만여명이다.


현재도 고려인 20만여명이 살고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시와 우수리스크시 등지는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 운동가들의 항일 투쟁이 가장 치열하게 펼쳐졌던 지역이다.


연해주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독립 운동가들의 면면과 지역별 항일 투쟁의 발자취 독립 운동가들의 애국정신 보존과 계승 등을 분야별로 재조명해본다. 다음은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이다.


△안중근(1879~1910년):연해주 애국단체인 동의회 평의원으로 1909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기차를 타고 중국 하얼빈으로 잠입,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


△최재형(1885~1920년):1909년 이범윤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켰으며 1910년엔 대동공보를 인수, 언론투쟁을 펼쳤다.


△유인석(1842~1915년):1907년 8월 정미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1908년 7월 원산에서 블라디 보스토크로 건너가 13도의군 도총재로 추대돼 연해주 항일운동을 주도했다.


△이상설(1870~1917년):연해주 망명 정부였던 대한광복군 정부의 정통령을 역임했으며 러시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인 성명회와 13도의군 권업회 등 단체에서도 중심 역할을 했다.


△문창범(1886~1954년):1917년 우수리스크시에서 최초의 해외 임시정부로 창립됐던 전로 한족중앙총회와 1919년 조직된 대한국민의회 회장을 맡아 연해주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범진(1853~1910년):1901년부터 1905년까지 러시아 공사로 활약했으며 을사조약 이후 공관이 폐쇄된 뒤에도 러시아 당국과 외교교섭을 벌이는 등 연해주 지역의 민족운동을 지원했다.


△조명희(1894~1938년):추풍의 육성촌에서 중학교 교사로 근무했으며 일제의 농민 수탈과 이에 저항하는 지식인 운동가의 삶을 그린 `낙동강'과 `짓밟힌 고려인'등 작품을 남겼다.


△이동휘(1872~1935년):1915년 러시아로 망명한 뒤 1918년 신한촌 하바롭스크 거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고 1921년 고려 공산당을 창당,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이범윤(1856~1940년):1904년 러일전쟁시 간도지방의 의병 500여명과 함께 러시아군에 가담, 일본군을 공격했으며 1905년엔 연해주로 활동 무대를 옮겨 의병 육성 등에 전력을 기울였다.


△신채호(1880~1936년):1908년 블라디보스토크시에서 한글체 일간 신문이던 해조신문을 통해 교포들의 애국사상을 고취시키는 등 언론 투쟁을 벌였다.


△장지연(1864~1921년):1908년 부산에서 블라디 보스토크시로 건너가 해조신문 주필로서 일본의 침략성을 규탄하는 등의 활동을 나섰다.


△장도빈(1888~1963년):1908년부터 1910년까지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일인하지(日人何知)'등 논설을 집필하며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으며 1910년 연해주로 망명, 권업신문에 기고하는 등 국권 회복에 주력했다.


서재진 프라이드 여행사 대표는 “연해주 일대는 발걸음이 닿는 데마다 독립운동가들의 발자취가 가득, 애국 관광지로서 인기가 높다”고 했다.


장성일기자